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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공공도서관 900개, 노래방9만개인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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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06-03-08
[중앙일보 전상인] 방학기간에는, 시내 대형 서점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책 사러 나오기보다는 책 보러 나온 이가 더 많을 성싶다. 초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학부모에 이르기까지 더러는 통로에 쪼그려, 더러는 서가에 기대어 독서삼매에 깊이 빠진 모습이다.
이들을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한 서점도 많은데 북새통이긴 마찬가지다.
혹한을 녹이는 뜨거운 독서열, 그리고 고객에 대한 서점 측의 따뜻한 배려는 얼핏 보아 건강하기 이를 데 없는 문화적 풍경이다.
그러나 서점이 결코 도서관은 아니다. 서점에 들러 책을 브라우징(browsing)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곳을 점령한 자세로 열심히 읽고 있는 사람들이 가야 할 곳은 당연히
도서관이어야 한다. 문제는 그들을 반길 도서관이 거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현재 우리나라 도서관은 모두 1만 개 내외다. 비록 같은 반열은 아니지만 전국의 노래방 숫자는 9만 개라 한다. 그나마 전체 도서관 가운데 90% 이상은 학교도서관이며, 5%에도 미치지 못하는 공공도서관의 경우도 반 이상이 교육청 소속이다. 공공도서관 실태에 관한 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와의 비교는 생략하는 게 오히려 속 편하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5 한국의 사회지표'는 책 안 읽는 우리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신문 대금을 빼면 우리나라 성인들의 책 구입비는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이런 얘기를 접할 때마다 우리들은 무슨 죄라도 진 것처럼 무안해하거나 민망스러워한다.
하지만 심하게 자책할 필요는 없다. 더 큰 잘못은 책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적 공간조차 구비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척박한 문화수준이다.
버지니아 울프쯤 되어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막상 서재를 꾸미거나 별장을 장만하는 능력은 대부분 벅차다.
더구나 국토는 좁고 인구는 많은 형편에서 개인의 힘으로
나 홀로 영역을 확보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대안은 국가가 나서서
공공도서관을 대폭 확충하는 것이다.
우선 공공도서관은 잠시나마 개인의 사적 공간으로 활용되면서 '문화자본'을 늘린다.
그것은 또한 사회의 공적 영역으로 기능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사회자본'을 키운다.
공공도서관은 마음의 양식을 만들고, 공공도서관은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19세기 이후 서구사회에서 정착된 공공도서관의 역사가 웅변한다.
공공도서관의 수적 확대는 우리 사회의 열악한 고급도서 출판 환경을
개선하는데도 필수불가결하다. 시집이 팔리지 않아 전업 시인이 없다시피 하는 나라,
학술서적을 겨우 수백 권 찍어도 계속 재고가 쌓이는 나라를 만든 책임은
공공도서관을 불과 500개도 갖추지 못한 국가와 사회로 귀속돼 마땅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 굴지의 초대형 도서관도, 세계 첨단의 디지털 도서관도 아니다.
옆집이나 시장 가는 기분으로 나서 맑은 날은 걷되 궂은 날도
마을버스 타면 될 정도로 가깝고 편리하고 쾌적한 지역 도서관을 수천 개, 수만 개 만드는 일이 훨씬 더 시급하다.
다행히 서울시는 지난해 9개의 공공도서관을 새로 지은 데 이어
올해 20개를 더 만든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물론 낫지만 이런 숫자는 태부족이고 이런 추세 또한 역부족이다.
도서관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책과 서비스라는 인식 또한
별로 확고해 보이지 않는다. 정책의 중요성과 효율성 및 형평성을 고려할 때 결국
이 문제는 국가 주도로 추진돼야 한다.
문화국가나 품격사회는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침 대한출판문화협회는 '2006년 연중 독서문화 캠페인'을 시작하며
"책을 읽으면 행복합니다"라는 대형 펼침막을 사옥 외벽에 내걸었다. 이젠 정부가 대대적인 공공도서관 건립 사업을 통해
국민의 행복을 위한 물리적 인프라를 제공할 때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약력=연세대 정외과 졸. 미국 브라운대 사회학박사. 한림대 교수 역임. 저서 '고개숙인 수정주의:한국현대사의 역사사회학' '세상과 사람 사이' 등. 중앙일보 2006-01-12
출처 중앙일보 2006-01-12